[이데일리 스타in 주영로 기자] “늦게 출발했다고 해서 늦은 건 아니잖아요.”
스물셋의 나이로 이제 막 프로의 첫발을 내디딘 강지선은 2020년 새로운 출발을 시작하며 이렇게 비장한 각오를 밝혔다.
강지선은 2019년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드림투어 상금순위 18위로 내년 정규투어 직행 티켓을 받았다. 10대부터 프로 생활을 시작하는 선수들에 비하면 5년이나 늦은 나이에 프로 첫발을 내딛게 됐지만, 그는 늦은 만큼 더 열심히 달리겠다는 각오로 내년 시즌 개막을 준비하고 있다.
강지선은 KLPGA 투어에서 활동하는 선수들과는 조금 다른 길을 걸어 프로가 됐다. 어려서부터 운동하는 걸 좋아했던 그에게 스포츠 뉴스에 나오는 타이거 우즈나 미셸 위의 모습은 더욱 멋있게 보였다. 강지선은 “골프채를 들고 스윙하는 모습이 왠지 더 멋있어 보였다”며 “초등학교 6학년 때 아버지를 따라 연습장에 갔다가 골프를 배우고 싶다고 졸랐다”고 골프를 시작하게 된 이유를 설명했다.
골프를 배우기 전에 100m와 멀리뛰기 선수 경험이 있었던 덕분인지 골프도 금방 배웠다. 치는 대로 공이 쭉쭉 뻗어 갔고, 주변에선 재능이 있다는 소리를 들었다. 당시만해도 골프를 배우는 또래들과 거의 비슷한 과정을 거쳤다. 그러다 중학교 3학년 때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유학을 떠난 오빠를 따라 그도 골프유학길에 올랐다. 그는 “집에서 영어도 배울 수 있고 골프도 마음껏 칠 수 있는 환경이 되니 오빠를 따라가서 골프를 배워보라고 해서 가게 됐다”며 “처음 1~2년 동안은 타지 생활이 적응되지 않아 매일 울고불고 난리를 쳤는데 3년째부터는 오히려 그곳 생활이 편해지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남아공은 미국, 유럽, 호주 등과 함께 골프 환경이 잘 갖춰졌다. 게리 플레이어와 어니 엘스, 레티프 구센, 루이 우스트이즌 등 걸출한 스타도 많이 배출해냈다.
골프를 좋아하는 강지선에겐 천국이나 다름없었다. 학교에 갔다 오면 해가 떨어질 때까지 마음껏 골프를 칠 수 있었다. 그는 “처음엔 외로움이 컸지만, 조금씩 현지 생활에 적응하다 보니 좋은 경험이 됐다”고 말했다.
국내에서 골프를 배우는 주니어 골퍼는 학교생활은 뒷전인 채 성적 위주의 훈련을 받는다. 대회에 나가 입상을 해서 상비군이나 국가대표로 발탁되는 걸 가장 큰 목표로 삼는다. 그리고 만 18세가 되면 프로 생활을 시작하는 코스를 밟는다. 그러다 보니 하루종일 1000개, 2000개씩 공을 치는 집중적인 훈련 방식이 많았다.
그에 비하면 남아공의 골프환경은 성적보다 경험이 먼저였다. 어느 한 가지 기술에 치우치지 않는 조화를 강조했고 공을 많이 치기보다는 라운드 위주의 훈련을 통해 스스로 경기를 풀어가고 창의력을 발휘해 배운 기술을 활용하는 훈련이 많았다.
강지선은 “남아공에서 골프를 배우는 내내 좋은 성적을 내야 한다는 부담을 가진 적이 없었다”며 “9개 주를 대표하는 선수들이 대항전 등의 경기를 펼치지만 좋은 성적을 내지 못했다고 해서 혼을 내거나 꾸중하는 코치는 한 명도 없었다”고 국내와 남아공의 교육환경 차이를 설명했다. 이어 “오히려 평소 실력만큼 성적을 내지 못하고 돌아오면 ‘배운 게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는 격려를 더 많이 들었다”며 “성적보다 경험을 쌓는 게 중요하다는 말을 많이 들었고, 그러다 보니 더 잘하고 싶어서 스스로 훈련하고 노력하는 일이 많아졌다”고 말했다.
다른 훈련 방식 탓에 강지선의 성장은 더뎠다. 그는 남아공에서 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낸 뒤 미국 플로리다주에 있는 데이토나 스테이트 컬리지로 진학했다. 대학 시절엔 NJCAA(전미전문대학스포츠연맹) 여자골프 1위에 올랐을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았다. 그러다 잠시 귀국해 국내의 학생들과 함께 훈련할 기회가 생겼다. 강지선은 그때 자신의 실력에 실망했다. 그는 “당시 고2, 고3 등 어린 학생들과 함께 훈련했는데, 그때 그 선수들이 공을 치는 수준에 깜짝 놀랐다”며 “거리도 더 멀리 쳤지만 기술적으로 굉장한 수준이었고 쉽게 언더파를 치는 모습을 보고 ‘같은 선수지만 다른 세계에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3년 대학 생활까지 모두 마친 강지선은 학업과 프로 활동을 두고 고민했다. 더 좋은 대학에 진학해 학업을 계속하고 싶은 마음도 컸다. 강지선은 “대학에서 비즈니스를 전공했는데 스포츠매니지먼트와 관련된 공부를 더 하고 싶었다”면서 “좋은 대학에 들어가서 졸업증을 따고 싶은 마음도 컸는데 그걸 포기하고 프로의 길을 선택하는 것이 조금은 아쉽기도 했다”고 학업을 계속하지 못한 아쉬움을 다시 꺼내보였다.
고민 끝에 프로가 되기로 마음먹은 강지선은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와 KLPGA 투어 도전을 저울질하다 한국을 선택했다. 미국에서 혼자 투어 활동을 하려면 많은 경비가 들었고, 그런 경제적인 부담을 덜기 위해 한국에서 프로 경험을 쌓은 뒤 다시 미국으로 가겠다는 계획을 세워 돌아왔다.
2017년 한국으로 돌아온 강지선은 3부(점프) 투어를 시작으로 프로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KLPGA 투어에선 강지선보다 나이 어린 선수들이 수두룩했지만, 그에겐 그저 부러움의 대상일 뿐이었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프로에서의 활동도 성장 속도가 더뎠다. 점프 투어에서 우승한 적도 있지만, 정규 투어 진출까지는 속도를 내지 못했다. 그럴 때마다 강지선은 자신을 다독였다. 그는 “TV를 통해 또래 친구들이 우승하고 펄펄 나는 모습을 보면 많이 부러웠다”며 “그럴 때마다 ‘나도 열심히 하면 기회가 올 것’이라고 생각했고 ‘늦게 출발했다고 해서 늦은 건 아니다. 꽃은 늦게 필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천천히 기회를 기다렸다”고 말했다.
조금씩 성장하던 강지선에게 함께 꽃을 피울 동반자가 등장했다. 그를 유심히 지켜보던 지유진(40) 삼천리골프단 감독이 올해 초부터 강지선의 든든한 지원군이 돼 힘을 실어주고 있다. 지유진 감독은 1999년 KLPGA 투어에 입회, 2011년까지 프로로 활동했다. 현재는 김해림, 박채윤 등이 소속된 삼천리 골프단의 감독으로 후진을 양성하고 있다.
지 감독을 만난 이후 강지선은 하나씩 꽃망울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5월까지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하던 그는 6월 드림투어 7차전 12위를 시작으로 7월에는 11차전 7위, 12차전 준우승을 차지하면서 쭉쭉 상금순위를 끌어올렸다. 8월에는 KLPGA 투어 제주 삼다수 마스터스에 추천 선수로 나가 6위에 오르는 등 빠르게 성장했다. 이후로도 꾸준한 성적을 낸 강지선은 드림투어 상금순위 18위로 시즌을 마감, 20위까지 주어지는 2020년 KLPGA 투어 출전권을 따내는 기쁨을 맛봤다.
강지선은 “드림투어 18위로 시즌을 끝냈을 때 너무 좋았다”며 “시드전에 가지 않게 된 것만으로도 정말 기뻤다”고 돌아봤다.
강지선은 3년 전 국내로 돌아오면서 3년 안에 KLPGA 투어에 입성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올 초만 해도 목표 달성이 어려울 것 같았지만, 지 감독을 만나면서 그 목표를 함께 이뤘다. 강지선은 “이전까지는 지금처럼 훈련한 적이 없었다”며 “지 감독님과 함께 한 뒤로 상당히 실용적인 훈련을 하게 됐고 그 덕분에 골프가 훌쩍 성장하고 있다”고 고마워했다.
강지선은 다가올 동계훈련을 앞두고 바짝 긴장하고 있다. 그는 “지 감독님이 평소엔 언니처럼 다정하지만 훈련할 때는 아빠보다 더 무섭다”며 “1월부터 미국으로 8주 동안 전지훈련을 떠날 계획인데 어떻게 버틸지 벌써 떨리고 긴장된다”고 마음을 졸였다. 그러면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올 때쯤 얼마나 성장해 있을지 궁금하다”고 기대했다.
172cm의 다부진 체격을 지난 강지선은 드라이브샷 평균 260야드를 날리는 장타자다. 이번 겨울 훈련을 통해 “비거리를
지금보다 10야드 더 늘리고 강한 체력을 만들어 2020시즌 늦깎이 골퍼의 돌풍을 일으켜보겠다”고 힘줘 말했다.
기사제공 이데일리